바쁘신 와중에도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2년제 실내디자인 학과를 졸업 후 시각디자인 분야 중 브랜드 디자인이 하고 싶어 학원에 등록하여 3개월을 다니며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지방에 취업했습니다.
©Med Badr Chemmaoui
회사 특성상 공공디자인을 하는 회사이기에 가치와 이념이 멋있었고, 무엇보다 비전공자에 기초가 없는 저를 채용한 회사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오래 다니자고 마음먹었는데, 문제는 기초입니다.
제 실력이 늘 발목을 잡네요. 빠르게 디자인을 해야 하는데 흰 도큐먼트와 원고를 볼 때면 어떤 글을 강조하고 어떻게 글을 정리해야 하는지 너무 어려워 밤을 새우기가 일쑤입니다. 압박감이 심해 이제는 공포까지 생깁니다. 시각디자인을 너무 만만하게 봤구나 싶습니다.
이참에 퇴사를 하고 1년 정도 공부를 하려고 하는데 이 회사를 나가면 제 학력도 문제고, 비전공자라 또 뽑힐 수 없을까 봐 너무 걱정이 됩니다.
안녕하세요! 비전공자로 시작하여 고민이 많으시겠어요. 저도 비슷한 상황에서 시작하였기에 경험을 토대로 하나씩 천천히 답변을 드려보겠습니다.
고민점을 다시 되짚어보면 기초가 없는 상태에서 일을 하다 보니 자신이 없고, 과도한 업무로 충분히 공부를 할 수 없어 공부기간을 가지기 위해 퇴사를 고려하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여기서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겠죠.
1. 회사를 계속 다니면서 공부를 한다.
장점 : 재취업에 대한 불안이 없으며, 정기적인 수익+커리어 공백이 생기지 않는다.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실무를 하면서,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보고 배우면서 보는 눈을 높일 수 있다.
단점 : 개인적으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하다.
2. 퇴사 후 공부를 한 뒤, 다시 재취업을 한다.
장점 : 공부할 시간이 여유로워 많은 배움을 습득하고 연습해 볼 수 있다.
단점 : 독학으로 다소 느슨해질 수 있고, 스스로 얼마만큼 성장할 수 있을지 알기 어렵다. + 재취업에 대한 불안감을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한다.
©Autri Taheri
저는 위의 두 상황 중 그래도 1번을 추천드립니다. 저도 멘티님처럼 비전공자로 시작하여 첫 업무를 받고 막막할 때가 많았어요. 저는 다행히 야근은 많지 않아 저녁과 주말을 활용하여 개인적으로 공부할 시간이 있었고, 일을 쉴 수 없는 상황이라 회사를 계속 다니면서 공부를 한 케이스입니다.
물론 시간을 쪼개서 공부하다 보니 습득은 느린 편이였어요. 다만 다른 디자이너와 함께 계속 일하면서 보고 배우는 것들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보는 눈이 올라갔던 것 같아요. 업무를 하면서 의무적으로 좋은 레퍼런스를 많이 찾아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점점 눈이 높아지거든요.(물론 단기간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고 시간이 필요해요) 일단 보는 눈이 높아지니 내 디자인에 대한 평가를 잘했다 못했다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게 되었고, 뒤이어 오는 실력 향상에도 도움이 되었어요.
아마 회사를 나와서 혼자 공부했다면, 고립되어 있기도 하고 또, 자유롭다 보니 느슨해지는 경향 때문에 눈높이를 향상시키는 것은 더디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그래서 연습하는 시간이 부족하더라도 보는 눈을 높일 수 있는 환경이 되신다면 퇴사를 좀 더 미뤄보시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디자인을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가능하려면 그만큼 수준 높은 눈높이를 가지고 있어야 하니까요.
©Alice Dietrich
다만, 눈높이 향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이론에 대한 공부가 선행되어야 해요. 편집 디자인을 하신다면 더욱이 기초 이론을 탄탄히 하셔야 합니다. 편집 디자인은 브랜딩을 포함한 모든 시각디자인 일에서 가장 기초가 되는 작업이에요.
공부하는 방법은 서점 및 도서관에가셔서 '타이포그래피', '그리드시스템', '편집디자인'이라는 제목의 책을 참고해보세요. 추천책으로는
-잰 화이트의 <편집디자인>
-원유홍 교수님의<타이포그래피 천일야화>
-요제프뮐러 브로크만의 <디자이너를 위한 그리드 시스템>
-킴벌리일램의 <그리드디자인> 등이 있습니다.
이 책들이 만약 어렵게 느껴지신다면 <좋은문서 디자인 기본 원리 29>라는 책을 선행하시는 것을 추천드려요. 비전공자를 위한 책이라서 아마 다른 책들보다 쉬울 거예요. 참고로, 책 보는 순서는 타이포, 편집디자인, 그리드 순으로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일이 너무 바빠서 연습할 시간은 없으시더라도, 위에 말씀드린 4~5권 정도의 책을 읽어보실 시간은 되신다면, 일단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퇴사 결정을 유보해두시는 것을 권장 드려요. 책을 읽어봐도 도저히 모르겠고 눈에 안 들어온다고 하신다면 패스트 캠퍼스의 '타이포그래피와 편집디자인(강구룡. 오성수 강사님)'강의를 추천드립니다.
©Raphael Schaller
제가 이론 공부를 이토록 강조하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요, 이론을 공부하게 되면 기본적으로 ‘최소한 이렇게 글자와 이미지를 배열해야 좋아 보인다’는 원리를 학습할 수 있어요. 저도 처음 디자인을 시작했을 때 '디자인이란 것은 그냥 요소들을 감각적으로 좋아 보이는 위치에 배치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는데 이론을 배우고 나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디자인에는 기본적으로 좋아 보이는 원리, 원칙, 구도, 시스템들이 있으며, 그것을 충분히 습득하고 익숙해졌을 때, 그 원리와 틀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작업들을 해보면서 점차 나만의 스타일, 구도 등이 만들어져요.
이러한 기초 원리들을 익히고 나면, 빈 화면을 보고 막막해지는 현상이 현저히 줄어들 거예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막막하다면 일단은 기본구도로 짜나 간 다음 하나씩 변형해서 고쳐 나가면 되니까요. 그리고 이론을 습득하고 나면 다른 좋은 디자인 작품들이 왜 좋아 보이는 것인지 파악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만든 디자이너는 이러한 원리 원칙에 의해 이런 식으로 배치했구나’ 하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디자인 뒤에 숨어있는 원리를 읽을 수 있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보는 눈이 높아진답니다. 저도 회사를 다니면서 퇴근 후 개인적인 시간에 공부할 때, 컴퓨터를 켜서 디자인 작업하는 시간보다는 책이나 강의를 통한 이론을 습득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밤에는 이론을 공부하고 낮에 회사 가서는 작업을 하면서 전날 배웠던 이론을 실질적으로 적용해나갔죠. 그러면서 아주 천천히 천천히 실력이 쌓였던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 책이나 강의를 통해 약간의 이론 공부를 하실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퇴사는 한발 물러나 생각을 해보시고 일단 말씀드린 방법 대로 한번 공부를 시작해 보신 다음, 정말 시간이 부족해서 안되겠다 싶으시다면 그때 퇴사를 생각해 봐도 늦지 않을 것 같아요.
이상 답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추가 질문이 있다면 잇다에 글 남겨주세요.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