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 게임기획 습작/포폴엔 피드백이 없을까요?
게임 개발자에는 여러 직군이 있지만, 분명한 결과물, 혹은 스킬로 승부를 보는 아트 영역과 프로그램 영역과는 달리, 기획 영역은 자신의 실력이나 능력을 입증하기가 까다롭습니다. 어느정도 경력이 쌓이게 되면 자신이 몸 담았던 프로젝트들과 그 안에서의 역할로 입증이 가능합니다만, 신입 시절이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하죠.
그래서 신입을 목표로 하는 기획 지망생은 여러 커뮤니티, 자신의 SNS, 혹은 멘토 분께 자신의 습작을 올립니다. 뭐가 부족한지, 뭘 더 보충해야 하는지를 궁금해 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이 때는 대개, 자신으로선 힘들게, 그리고 열심히 작업한 습작/포폴에 반응이 없습니다. 다른 지망생들이 올린 자료에는 많은 피드백이 달리는데, 자신의 글에는 악플보다 무섭다는 무플입니다. 퀄리티가 문제인가 싶어 더 열심히 한 다른 포폴을 올렸지만, 그것에도 피드백이 없습니다. 좋은 소리만 듣고 싶은 것도 아니고, 쓴소리라도 팍팍 해줬으면 하는데, 그저 답답할 뿐입니다.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대부분 지망생 분들께선 기획서 / 역기획서 / 제안서 / 분석서 의 개념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여기서 제가 얘기하는 ‘여러분’은 지망생 전체를 지칭하는게 아니라, 포폴을 올려도 피드백을 받지 못하는, 그리고 지금부터 제가 아래에서 설명할 문서를 만드신 분들을 뜻합니다. 오해 없으셨으면 합니다. 더불어 글의 뉘앙스에 대해서도 너른 이해 부탁드립니다).
‘와, 이런 게임을 만들면 재미있겠지?’라는 마음에서 게임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만든 기획서를 올리지만 역시나 반응이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지금 올리신 그 문서가 ‘기획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굳이 정의하자면 ‘설명서’가 되겠고, 범주로 치면 ‘제안서’가 될 것입니다.
‘게임 기획서’란 ‘그냥 머릿속에 떠오른 것만을 정리한 문서’가 아니라, ‘나 이외의 실무자들이 이 문서로 게임을 만들 수 있도록 만든 문서’ 입니다. 제일 중요한 요소는 바로 ‘구체화’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아파트의 ‘설계도’와 같은 것입니다. 목수 분들과 미장이 분들, 전기 기술자 분들과 같은 ‘실무자’들이 일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올리신 문서는 이런 ‘설계도’가 아니라 ‘제안서(설명서)’이기 때문에 피드백이 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제안서’는 아파트의 ‘분양 소개서’와 같습니다. 이 아파트는 어디에 위치해 있고, 규모는 얼마나 되며, 평형별 가구 수는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가격은 얼마인지 하는 것들이 나와있는 바로 그 문서 입니다.(이 얘기의 연장은 아래에서 다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더 쉽게 예를 들면,
A: 내가 이런 게임을 기획했어!
B: 오 그래? 어떤 게임인데?
A: 이런이런 룰이 있고, 이런 캐릭터가 나오고, 이런 재미가 있는 게임이야!
B: 오 그렇군.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어?
A: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야지
여러분이 올린 문서는 딱 여기에서 멈춘 문서입니다. 그냥 자기가 생각하는 게임이 뭔지 설명(제안)만 하는 것이죠. 이 대화가 기획서가 되려면 이렇게 될 수 있어야 합니다.
A: 내가 이런 게임을 기획했어!
B: 오 그래? 어떤 게임인데?
A: 그래픽 리소스는 이런이런 것들이 필요하고, 컨셉은 이러이러해. 게임 룰은 이런데, 상세한 프로세스는 이렇게 돼. 이 게임에서 이 모드가 핵심 컨텐츠 중 하나인데, 이 모드의 전체 구조는 이렇고, 유저가 게임 내 다른 지점에 있다가 이 모드로 오려면 이런 과정을 거쳐. 그리고 시나리오는 이런 내용인데 이건 유저한테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서 전달되고.. 블라블라블라블라
B: 좋아! 그럼 당장 만들 수 있겠다!
어렵죠? 어렵습니다. 그래서 기획서 잘쓰기란 업력이 몇 년이 지난 현업인들에게도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조금 다른 얘기입니다만,
현업인들이 ‘기획서를 쪼개서 쓰세요’라고 하는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점 때문입니다. 클리커 게임 하나만 하더라도 기획서를 하나로 퉁치자면 (문서의)규모가 생각보다 굉장합니다. 하물며 MMORPG와 같은 게임을 ‘기획서 입니다.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라고 문서 하나로 올리면 현업인들은 덧글은 커녕, 읽어보지도 않습니다. 안봐도 뻔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역기획서를 작성해봤습니다. 피드백 부탁드립니다'라고 올려도 반응이 없는 경우라면?
아마 그것은 높은 확률로 역기획서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획서가 뭔지 모르고, 그것을 쓸 수 없는 상황에서 역기획서를 써봤자 그것은 역기획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기획서는 기획서보다 쉽습니다. ‘쉬운 문서’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기획서보다 쉽다’는 얘기입니다. 기획서는 실재하지 않는, ‘내 머릿속에 있는’것을 ‘구체화’시키는 문서입니다. 전문 학술 논문에 따르면, 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아무리 말과 문서로 잘 설명한다 하더라도, 상대방이 알아듣는 것은 7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역기획서는? 이미 있는 게임과 있는 시스템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것들 것 재구성, 재구축하는 것이죠.
여기서 많은 지망생들이 헷갈려하는 부분은 바로 ‘분석서’와의 차이점입니다. 분석서는 말 그대로 그걸 분석만 해 놓은 것입니다.
예를들어 여기 완성되어 있는 1000 피스짜리 퍼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역기획서는 이 퍼즐을 완전히 확 쏟아놓은 다음, 도안을 보며 처음부터 다시 맞추는 것입니다.
-분석서는 완성되어 있는 퍼즐에서 하나하나를 순서대로 떼어내는 것입니다.
(※기획서는? 그냥 이 완성되어 있는 퍼즐 자체가 없습니다. 완성된 도안만 내 머릿속에 있고, 이걸 이제 (도안까지 닿기 위해)퍼즐화 시키는 작업부터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역기획서는 분명 어렵지만, 기획서보단 쉬운 것입니다)
역기획서는 어떤 특정 게임 or 게임의 시스템이 있을 때, 그걸 설명하거나 공략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그냥 분석서 입니다. 이미 존재하는 어떤 요리에 대한 맛보기 품평(분석서)과 그 요리의 레시피(역기획서)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햄버그 스테이크라는 이미 존재하는 요리에 대해, 여러 레시피가 시중에 존재합니다. 그건 마치 역기획서가 여러 종류가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누구는 계란을 넣고, 누구는 넣지 않습니다. 누구는 원형으로 만들지만 누구는 납작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과정은 조금씩 달라도 결과는 모두 훌륭한 햄버그 스테이크가 됩니다. 즉, 역기획서는 정답이 있는게 아닙니다. 결과론적으로 이미 존재하는 게임 / 게임 시스템에 최대한 근접할 수 있는 기획서가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햄버그 스테이크는 이런 맛이고, 저런 식감이고, 접시 세팅은 어떻게 되어있고’라는 품평만 있다면 그 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분석서가 역기획서가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제 제안서(설명서)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업력이 몇 년이 넘는 현업 기획자들도, 신규 게임, 즉 내가 생각하는 게임의 ‘제안서’를 쓸 일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그만큼의 직위와 직책 요건이 맞기도 해야겠지만, 무엇보다 돈과 책임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는 일이니까요. 물론, 제안서에는 설명이 들어가는게 맞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게임을 설명해줘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게임이 뭔지 그냥 설명만 하면 될까요? 아까의 아파트 얘기로 돌아가면, 제안서에 해당하는 분양 소개서는 이 아파트를 구매하는, 즉 돈을 내는 사람들이 보게 됩니다. 그 사람들은 이 분양 소개서를 보고 돈을 낼지 내지 않을지에 대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냥 무미건조한 아파트 설명이, 그것도 꼼꼼하게 쓰여있지 않으면 돈을 내게 될까요?
(이 문단은 모 지인 분의 글 인용입니다)‘우리 그냥 이런거 만들죠?’ 라고 쓰기엔 제안서는 책임이 매우 무겁습니다. 제안서는 ‘재미’와 ‘사업성’을 다룹니다. 그 문서는 양쪽 모두의 전문성을 만족해야 합니다. 문서를 봤는데 이용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개발비를 줄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개발할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그런 제안서는 총체적 난국인 셈이지요.
※ 참고로 ‘제안서’는 ‘컨셉 기획서’란 말로도 대체됩니다. 물론 속 알맹이는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여러분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지망생 입장에서는 제안서도 충분히 써 볼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물론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제안서에 피드백이 달리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시면 안됩니다. 현업인 분들이 신입을 뽑을 땐 자신의 부사수(또는 소위 말하는 '새끼 기획자')를 뽑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부사수에게 필요한건 기획서(역기획서 포함), 넓게 봤을 때 그나마 분석서를 쓰는 능력이지, 제안서를 쓰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게임이 재밌겠어! 이런 게임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는 누구나 던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게임 기획자는 그것을 '구체화 시키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현업인 분들은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역으로 이 직업을 지망하시는 분들이 ‘제안서’를 제출하면 피드백은 커녕 한숨만 쉬게 되는 것입니다(그것도 꼼꼼하지 못한, 어설픈 아이디어 제시 수준이라면 분노까지 더해짐).
‘제안서가 아니라 역기획서를 올렸는데 왜 피드백이 없을까요?’ 란 질문을 하시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게 역기획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잘 쓴 기획서/역기획서에는 알아서 피드백들 많이 달립니다(칭찬이건 비판이건).
자, 이제 슬슬 마지막입니다. FAQ로 대체하도록 하죠.
▶ 제안서(컨셉 기획서)를 올렸는데 피드백이 없어요 – 원래 그렇습니다.
▶ 분석서를 올렸는데 피드백이 없어요 – 원래 그렇습니다
▶ 기획서를 올렸는데 피드백이 없어요 – 올리신 문서가 제안서(컨셉 기획서)는 아닌가요?
▶ ‘진짜 기획서’를 올렸는데 피드백이 없어요 – 제안서는 아니지만, 기획서의 퀄리티가 너무 낮아서 어디서부터 손대야 될 지 모르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역기획서를 올렸는데 피드백이 없어요 – 올리신 문서가 분석서는 아닌가요?
▶ ‘진짜 역기획서’를 올렸는데 피드백이 없어요 – 분석서는 아니지만, 역기획서의 퀄리티가 너무 낮아서 어디서부터 손대야 될 지 모르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 객관적으로 정말 제대로 된 기획서/역기획서 인데 피드백이 없어요 - 극히 낮은 확률이겠지만, 이건 정말 '불운한 케이스'입니다. 좀 더 활성화 된 커뮤니티 or 멘토 분께 평가를 부탁드리면 어떨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