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암흑기의 선택
고등학생으로 대학을 고민할 때 IMF가 터졌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도 경제상황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큰 경제위기의 파도가 들이닥쳤습니다. 그러면서 '안정적인 직장'을 원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대기업도, 성장하던 중소기업도 많이 무너졌습니다. 공무원 열풍이 불었습니다. 공기업도 '신의 직장'이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공공기관'이라는 표현이 정확하지만 역시 익숙한 단어는 공기업이지요.
저는 이 암흑기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할지 고민했습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으나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더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보다 다른 길을 찾고 싶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던 시점에 저도 지방공기업에 합격했습니다.
연봉이 높고 업무량이 많지 않으면서 미래가 확실히 보장되는 직장은 있습니다. 좋은 직장은 당연히 경쟁률이 세고 준비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어학과 자격증, 각종 경험과 좋은 학벌 등 스펙이 필요합니다. 저는 대기업에 도전조차 생각지 못했습니다.
대졸이긴 했으나 이름을 말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토익 성적을 올리려고 700점대를 간신히 맞추었습니다. 워드프로세서 자격증 하나를 가지고 공공기관에 매일 지원서를 보냈습니다. 100번인지 200번인지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최종 3군데에서 서류를 통과시켜주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왜 공공기관을 선택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기업에 들어갈 실력은 안되고 중소기업은 알짜배기를 찾아볼 방법도, 미래가 보장되지도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경제위기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이루어 놓은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목표를 공공기관으로 잡으면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해 둔 경험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공무원이 되는 것도 '안정적인 직장'의 관점에서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1년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최대 4번이었습니다. 국가직, 지방직, 법원직, 군무원 시험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량진 학원에서 먹고 자고 수업을 받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돈도 부담이었습니다.
은행권이나 외국계 기업, 대기업은 꿈도 못꾼 이유가 '조건 '이었습니다. 어학성적, 자격증 등 아무것도 갖춘 게 없었습니다. 준비하고 고민하지 못한 대학생활을 안타까워해 보았자 이미 지나간 시간이었습니다. 네이버 카페에 가입하고 신문도 열심히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공기업 연봉 순위'라는 자료를 보게 되었습니다. 물어보고 도움을 요청할 선배도 없으니 혼자만의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양이 질을 만든다"고 생각했습니다. 입사지원서를 쓰고 제출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지금은 NCS 시험과목을 준비하면 되지만 그때는 공무원 시험과 비슷한 과목들로 입사시험이 치러졌습니다.
서류전형에 계속 떨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700점을 겨우 넘긴 토익 성적표 하나를 가지고 지원서만 냅다 들이민다고 되는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그러자 경상도에 소재한 대학교에서 시험을 보러 오라고 했습니다.
시험은 필기와 실기였습니다. 영어, 상식, 한국사 등 시험을 어렵지 않게 치르고 문서작성 실기도 잘 마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일에 바로 이어진 면접도 간단한 영어 구술에 지원동기 등을 답하며 분위기가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경기도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합격 전화를 받았습니다. 다음주부터 출근 가능한지 묻는데 왠지 바로 대답하기 싫었습니다.
경기도에서 경상도까지 버스와 기차를 갈아타고 가야 하는 일정이었습니다. 하루 일찍 내려가 기차역 근처에서 숙박을 하고 미리 대학교 주변을 보면서 혹시 합격하면 어디에서 생활할지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면접 마지막 질문을 요구받았을 때 혹시 기숙사 배정도 가능한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불합격해도 서류만이라도 통과해 본 경험이 좋았습니다. 경쟁자들과 달리 여유있게 합격을 확신한 모습이 좋게 보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 합격 통지는 시간이 남았는데 시험 당일에 합격이라고 전화를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연봉을 물어보았습니다.
집에 와서 부모님과 상의했습니다. 1년간 월급 150만원을 받으며 생활비로 쓰고 남는게 얼마나 될까 싶었습니다. 근무 평가를 통해 정규직으로 근무할 수 있는 것도 불확실한 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하고 다음날 가지 않겠노라고 답신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후에 한국감정원 최종 면접까지 갔으나 떨어진 두번째 경험은 후에 너무나 안타까워했습니다.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도 모르고 서류에 합격했으니 가본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논술 시험을 한 번 더 통과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에 입사시험 교통비로 10만원을 받았으니 얼마나 대단한 곳입니까.
면접은 발표면접이었고, 면접장에 들어간 5명 중에 1명이 합격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준비가 덜 되었던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입사지원서 100개째였는지 200개째였는지 경기도에 새로 문을 여는 시설관리공단에 최종 합격했습니다.